학생활의 마지막 해를 맞는 수강신청 기간. 당시 이익유보금은 천억이 넘었지만 수강신청 서버를 늘리려는 의지도 관심도 없는 학교와 서버 개통시간 5분전부터 '새로 고침'을 눌러대고 매크로를 돌려대는 학생들의 비극적인 절박함 덕분에, 수강신청 항상 첫 몇시간은 1시간 중 10분 정도만 입력이 가능할 정도로 답답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항상 서버가 다운됐던 첫 5분에 정원이 다 차버리는 강의의 불가사의란!

어리버리한 저학번들과는 다르게, 고학번의 내공이 발휘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고학번의 수강신청이란, 어느 순간 올지 모르는 서버다운이 풀리는 순간을 포착하여, 메모장에 미리 쳐놓은 강의코드들을 복사하고 복잡한 풀다운메뉴를 프로게이머 뺨치는 전광석화같은 속도로 펼쳐 클릭해내고는, 아직 이 전장에 적응못했을 수많은 신병들의 패닉에 가득찬 얼굴을상상하고는 흐뭇하게 미소짓는 것으로 끝나야 하는 것이다.
강신청이 시작된 후 한두 시간이 지나면, 사실상 게임은 끝났다고 봐야 했다. 간혹 정원이 다시 비는 강의들도 있었지만, 항상 그렇듯 누구나 듣고 싶어하는 수업은 절대로 인원이 빠져나가지 않으니까. 하지만, 꼭 내키지는 않지만 그닥 나쁠 것 같지도 않은 수업들로 강의시간과 공강시간의 완벽한 조화를 거의 달성해낼 때 쯤이면, 꼭 마지막에 2~3학점 정도의 빈 자리가 신경을 거슬리게 되기 마련이다. 들어가고 싶은 강의는 좀처럼 사람이 나오지 않고, 대타를 넣자니 금요일이나 월요일에 학교를 나와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왠만한 전공학점은 3학년때까지 다 들어버렸고, 4학년 때는 좀 더 여유있게 학교를 다니고 싶었던 내게 오세철 교수의 '한국사회와 자본주의' 강의가 눈에 들어온 것을 바로 그런 타이밍이었다. 경영학 전공이면서, 왠지 어렵지 않을듯 하고 인기도 없고, 게다가 3시간 연강이라 쑤셔넣기도 좋고.

역시나 개강일부터 오세철 교수는 나의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반백의 노교수는 부드러운 말투로 본 강의는 사회주의 영화 감상과 토론 시간으로 진행될거라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간고사는 없고, 기말고사는 보고서 대체라니!만세, 만세, 만만세!!!

바로 옆, 위층, 아래층의 강의실을 가득채운 성취욕으로 가득한 경영학도들의 풍경과는 달리, 오 교수의 강의실을 채운 녀석들은 왠지 뿔테 안경의 음침한 운동권이거나, 어디로 들어갈지 갈팡질팡하다 흘러들어온 듯한 후드티를 입은 아웃사이더, 또는 비루한 분노에 찬 페미니스트들쯤이랄까. 물론 나 자신도 그 중 하나였겠지만.

어쨌든 오세철 교수와 그 강의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불성실했던 나의 수강 계기나 캠퍼스 가장 높은 곳에 우쭐대며 보수적 학풍을 자랑하던 상경대학과는 어울리지 않는 변두리스런 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하튼 나는 여유만만이었다. 영화나 보고 토론이나 하면 학점이 나온다는 오교수의 서글서글 자상한 설명은 수강변경기간까지 학생들을 잡아두려는 치밀한 전략인줄도 모르고.

지만, 오 교수가 보여주는 영화들은 하나같이 적응하기 힘든 것들 뿐이었다. 바로 전 시간에 신자유주의에 뇌를 푹 담근 채 국제경영전략 강의를 듣고, 저녁에는 바로 어제 프리라이더 한 명을 가차없이 팀원의 서명을 모아 교수에게 제출하여 잘라버렸던 조모임에 참석해야 했던 나에게, 전함 포템킨같은 소비에트 흑백무성영화 따위를 두 시간 동안 보는건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참 그땐 메트릭스가 유행하지 않았던가. 한마디로 낚였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며, 왠지 기말레포트 대박의 꿈이 쪽박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던 무렵, 어느 토론시간에 오세철 교수는 여느때처럼 차분한 말투로 한 학생의 의견을 반박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사민주의자들도 자본에 포섭되어 버린지 오래고, 북한은 아예 논외며, 소비에트도 스탈린 주의에 오염되어 혁명 초기부터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대안은 오직 폭력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소비에트식 평의회를 통한 진정한 사회주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기억을 더듬고 압축하자면 이런 논리였을까.
자신이 글로벌 기업 본사 중역이라도 된 양 캐시미어 정장을 차려입고 강의실 뒷편에 거들먹거리며 앉아 몽블랑 만년필로 물을 채운 크리스탈 언더락스 잔을 머리가 울리도록 땡~땡~ 쳐대며 발표자를 지적하던 A교수나, 아직 '미쿡유학' 시절의 자유분방함이 남아있다며 과시하는 듯한 면바지 캐주얼을 입고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피력하는 학생을 갈구던 B교수와 같은 부류에 익숙해져 있던 내게, 지루하게 사람좋은 듯했던 오세철 교수가 비로소 흥미로운 존재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이사장인 이곳에 어떻게 아직 저런 사람이 남아있었지? 그것도 상경대학에! 아니나 다를까 오 교수는 이번이 자신의 마지막 학기라고 고백했지만 말이다. 교수생활의 한계를 벗어나 현실참여를 하기 위해 스스로 그만두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모습에서 모종의 압력이 느껴졌달까..

교수는 말하자면 사회주의 이념의 순결주의자 같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현실의 주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자본가들만큼이나 증오ㅡ물론 겉으로 분출하는 일은 극히 적었지만ㅡ의 대상이었을 정도로. 어떤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든, 그의 논리는 자본-노동의 대립구도 안에서 일관적이었고, 때문에 예측이 쉬웠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 논쟁에서는, 주류 페미니스트들은 부르주아적 시각으로 노동계급 여성ㅡ비정규직 레즈비언이나 성 노동자를 포함하는ㅡ을 타자화했으며, 현실의 사회주의자들은 혁명 과정에서 철저히 여성을 탄압하고 착취했다는 식으로. 때문에 그에겐 페미니즘 자체가 무용한 것이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해지는 사회주의 폭력혁명이면 다 해결될 일이니까.

그러나, 진로탐색과 연계된 심리학 강의에서는 거짓 진로를 만들어내고, 진짜 페미니즘 수업에서는 남성 페미니스트 동지가 되었으며, 전공수업에서는 야망에 불타며 성공을 열망하는 경영학도를 연기해내며 학점 타먹는 일에 익숙했던 닳고닳은 졸업반 학생에게 그의 이상은 오로지 A를 받기 위한 분석의 대상일 뿐이었다. 아마 그도 이를 오래전에 눈치채고 참다 못해 고액연봉이 보장된 교수직을때려치려는 것이었겠지만 말이다. 서글서글 나긋나긋하게 자신의 고집인지 이상일지 모를 생각을 이야기하는 오 교수를 바라보며 호감을 느꼈음을 숨기지는 않겠다. 일관성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니까. 더구나 폭력혁명이라니, 저 나이에 저런 말을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있겠어?

다만 그를 바라보면 떠오르는 생각들.. '언젠가저 사람 언론에 나오겠구나, 국가보안법 위반같은걸로 말이야.' '이 중에 상당수는 오 교수가 이런 사람인지 알고 들어온 것같은데, 아, 저 몇 명은 확실히 골수 운동권이겠구나.' '차라리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바보 운동권 녀석들처럼ㅡ작가가 고장난 녹음기라고 표현했던ㅡ희극적이면 불쌍하지나 않으련만' 이런 생각들을 지우며 오 교수와 일 주일에 3시간 동안 뇌파를 싱크로하려 애쓰던 일은, 마치 변두리 모텔침대에서 헐떡이는 여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TV에서 흘러나오는 야구중계나 뉴스 따위에 몰두하며 기계적으로 허리를 흔들어대는 듯한 경험이었다. 죄책감과 허무함의 무성의한 배합. 하긴 나도 제대로된 놈이었다면 그 강의에서 자기 의견으로 싸웠겠지.

말보고서는 A+이 나왔고, 난 신간을 내면 조선일보 기자와 가장 먼저 소주를 마시게 된다는 한 좌파 지식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그는 '한겨레 기자는 무식해서 얘기가 안통하고, 상황은 알지만 그 조선일보 기자와 얘기를 하면 시간이 가는줄 모르거든'이라고했던가. 좌파 서적의 서평마저도 1빠로 채가던 조선일보 기자. 아, 난 그 조선일보 기자같은 놈은 될 수 있겠구나. 밥은 안 굶겠구나. 다행이다. 음하하.

수 년간 잊고 살던 오 교수가 포털 첫 화면에 등장했을때, 놀라움보다 반가움이 앞섯던 이유는 모르겠다. 기사를 읽으며, '이 양반 하나도 안 변했군'이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던 이유도 잘 모르겠고. 어쨌든 오 교수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되었고, 지지율이 바닥을 기는 정권은 그 의도와는 무관하게 관심에 목말랐을 그를 잠시나마 슈퍼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북한 정권도 남한 정권과 마찬가지로 반대하는 그가 이적행위를 한 것인지는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우리는 서점가에서 '국방부 선정 불온도서'가 되려 당당히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기나긴 시간 동안 벽을 보고 혼자 떠드는 기인 오세철 교수에게 이단 옆차기로 헛발질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모습은,
고액연봉의 찬란한 꿈과 타즈메니아로의 도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30대를 맞으려는 내게 잠시나마 유쾌한 희극이 되어주었다. 아, 비겁한 녀석!

by ryan | 2008/08/30 21:42 | 面 - SOCIETY | 트랙백(2)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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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foog.com at 2008/08/30 22:52

제목 : 오세철
선거권을 갖게 되고 최초로 찍은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 거의 천연기념물과 같은 이였기 때문이다. 당시 ‘민중회의’던가 하는 정체불명의 단체를 조직하여 국회의원 선거에 나선 후보였기 때문이다. 후보를 낸 선거구는 몇 군데였는가 하면... 서울 모선거구와 내가 살던 곳의 선거구 달랑 두 군데였다. 나는 자못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고 그 후보를 선택하였다. 그 민중의회의 대표는 ‘오세철’ 교수였다. 그의 이름은 그 뒤로도 마이너 중의 마이너로 등장하였......more

Tracked from nooegoch at 2008/08/31 20:12

제목 : 우리는 빨갱이
한마디..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짓밟아왔나요! 독재정권이 하던 짓! 또 하시려구요? 그것도 그대로... 그들이 왔다.. 맨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다. 나는 이들을 변호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그들은 노동운동가를 잡으러 왔다. 나는 이들을 변호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운동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 나는 이들을 변호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more

Commented by foog at 2008/08/30 22:51
잘 읽었습니다. 글을 참 맛깔스럽게 쓰시네요. 암튼 오세철씨가 풀려나서 참 다행입니다. :)
Commented by ryan at 2008/08/31 00:43
감사합니다. 저도 오 교수님이 풀려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말이죠. 개인적으로 어쩔 수 없이 헌법이 개정되는게 대세라면 표현의 자유가 헌법 첫 10개 조항 중 하나로 강조되었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참 호감가는 분이에요. 사상에는 동조하기 힘들지만 말이죠. ^ㅅ^a
Commented by 자그니 at 2008/08/31 13:56
...언젠가 제가 팟캐스팅...할 지도 모르겠어요... 이 포스팅 가지고.. 부디 양해를....;ㅁ;
Commented by ryan at 2008/08/31 14:08
자그니// 네, 저야 영광이죠. 나중에 알려만 주세요. ^ㅅ^
Commented by 쿠잇키 at 2008/08/31 23:38
2008년 5월20일부로ryan님께서 번역해주신 정치성향 테스트 페이지가 삭제되었습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영어를 할줄 알아서 본래 사이트를 사용하면 되지만 다른분들에게 알려주려고 하니
조금 안타깝습니다. 혹시 게시판 번역본을 백업해두신게 있는지요?
Commented by q at 2008/08/31 23:38
오랜만의 포스팅이 선선해진 날씨만큼이나 반갑네요.
저는 내일부터 방학끝, 다시 직장인 놀이 시작이지만 벌써 보드가방은 깔끔하게 준비해 두었다죠.
얼른 눈이 땅에 떨어지기를 빌어봅니다 ㅎㅎㅎ
Commented by ryan at 2008/09/01 00:26
쿠잇키// 이번 주 안으로 계정 빌려서라도 복구해놓도록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신경쓰지 못했더니 거미줄 치울 곳이 많네요.. ^ㅅ^;;;;;

q// 그러게요. 11월은 금방이다, 금방이다라고 암시를 걸며 즐겁게 기다리고 있답니다. 아직도 07/08시즌 마지막 카빙의 감촉이 생생하네요.. ㅋ
Commented by alextrasza at 2008/09/03 22:57
얼마만의 포스팅이십니까... T^T
Commented by ryan at 2008/09/04 19:14
alextrasza // 우왕.. 그러게요.. ㅜㅗㅜ
Commented by 쿨짹 at 2008/09/10 04:41
ryan님 넘 오랜만이에요~~~
역시 글솜씨는 여전하심다. :)

너무너무 반가워요. ㅠㅜ
Commented by ryan at 2008/09/13 23:45
쿨짹// 쿨짹님,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조만간 본격적으로 블로깅을 할 날이 있을것 같습니다. 정말 반가워요. ^ㅅ^
Commented by 바라스 at 2008/10/15 10:43
정말 반갑네요. 라이언님의 '본격적인' 블로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Commented by soru at 2008/11/14 23:37
오늘 오세철 교수가 다시 기소됐습니다.
문득 기사를 보고 이 포스트가 생각나서 코멘트 답니다.
마침 학교는 학생회장 선거철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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